산행

가을이 오는 왕등재습지

김의수 2007. 3. 21. 11:14

가을이 오는 왕등재습지

 

○ 언제 : 2005년 10월 3일 (월요일)

○ 어디에 : 지리산 동부 왕등재습지, 서왕등재

○ 테마 : 왕등재습지 탐사 및 태극종주 탐구 산행

○ 코스 : 오봉마을 임도끝(11:00) - 외고개(11:25) - 수철리 갈림길 전망대(12:10) -

             왕등재습지(12:20~12:50) - 서왕등재(13:10) - 왕등습지(13:30~14:20) -

             외고개(14:40) - 오봉마을 임도끝(15:00)

○ 산행시간 : 4시간

○ 산행방법 : 원점회기 산행

 

 

오늘의 등산로(노란선)

 

지리 열병은 나의 사랑 지리에 가고 싶어

새벽 2시에 나를 집을 나서게 한다.

김밥집으로 갔으나 지갑을 두고 왔다.

차 안의 동전으로 김밥 2줄은 구하였으나

내사랑 지리는 집에서 잠자고 아침에 오라 한다.

오전 9시 진주를 출발한다.

 

진주에서 대진고속도로를 달려 생초 I/C를 빠져나와 화계리에서 방곡리 방향으로 차를 몰아 간다.

6.25 전란중 1951년 2월 7일(설  다음날) 육군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견백청야'라는 작전명에 따라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이 전개되면서 가현, 방곡, 점촌, 서주 4개마을에서 705명이 희생되었다.

우리 아픈 역사의 상흔이다.

이들을 위한 추모공원이 방곡마을에 조성되어 있다.

6.25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지리산...

깊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지리산은 언제나 그대로 인것을...

 

오봉마을까지는 포장이 되어있다.

보름전 오봉마을에서 왕등재습지를 다녀온 적이 있다.

오봉마을 입구 오른쪽 동네 가는 길을 버리고 시냇물을 건너 임도를 1km 정도 오르면

수철리쪽으로 가는 길과 오봉마을 앞산을 오르는 길로 나누어 진다.

갈림길에서 급우회전하여 비포장을 천천히 차를 몰고 간다.

임도 정점부분에 새재로 가는 산죽의 등산로가 있고

임도 정점 50m 아래 외고개로 가는 등산로가 있다.

그 길을 따라 임도끝에 차를 세우고 지리산국립공원의 비지정등산로를 오른다.

 

임도끝에서 시작되는 완만한 등산로

 

공단의 그네들이 쳐놓은 금줄을 뒤로하고 20분 정도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면 외고개가 나타난다.

키보다 큰 억새가 외고개를 채운다.

남쪽으로는 대원사 계곡이 펼쳐지지만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발아래 넓은 평원이 보인다.

바래봉의 철쭉을 만들어 놓은 남원 운봉 국립종축장이 들어서기 전 이곳이 목장 후보지로 적합 판정이 났으나 교통문제 때문에 운봉으로 결정되고 이곳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 곳에는 어떤 일인가는 몰라도 벌목을 하느라 기계음이 요란 하였다.

동쪽으로 길을 간다.

 

지리산 동부지역은 신갈나무가 많다.

열매가 떨어져 지천에 널려 있다.

다람쥐, 멧돼지 야생동물의 먹이가 되리라.

멧돼지 이놈은 산기슭 농민에겐 우환이고 태극종주를 꿈꾸는 나에게는 걱정거리다.

 

외고개에서 왕등재습지 가는 길

 

 

지리산 동쪽에는 왕이 올랐다는 왕등재가 있다.

천혜의 경관을 자랑하는 왕등재는 지리산 주변의 산청과 함양의 전경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가 하면 영욕의 역사를 안고 도도히 흐르는 경호강의 물굽이를 발아래 두고 있다.

천왕봉이 용틀임하듯 산세가 그대로 뻗쳐내려온 지리산의 동쪽 자락 한가운데 있어 천왕봉의 위용과 동쪽 웅석봉의 고고한 자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멀리 아스라이 다가오는 다도해의 물결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왕등재는 천혜의 지리적 여건과 함께 가락국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한맺힌 구국 정신이 깃들인 역사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해 깊어가는 가을에 답사의 의미를 찾는다.

지리산 동부권역에는 특히 이 마지막 임금에 얽힌 사연이 깃들인 곳이 많이 있다.

그 가운데 이곳 왕등재가 가장 극적인 지점으로 인근의 왕산 기슭 구형왕릉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왕등재에 얽힌 구형왕 설화는 지리산에 들어온 구형왕이 왕등재에서 토성을 쌓고 항전하다가 끝내는 왕산으로 쫓겨가 최후를 맞게 됐다는 구전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흔적들로는 왕등재와 1030m고지를 원형으로 둘러싼 토성이다.

토성은 외성, 내성을 겹으로 쌓았는데 원래 높이는 3m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특히 성을 따라 적당한 간격으로 서 있는 남문, 서문, 북문 자리터를 동시에 찾아볼 수 있다.

 

추성산성을 축조하고 국골에서 병마를 훈련했다는 구전을 뒷받침하는 것들로는 얼음터, 두지터 등이다. 반면 왕등재의 사연은 왕등재 일원의 토성과 성문 흔적 이외에 왕등재 동남쪽의 935m 고지의 깃대봉(군대의 깃발을 걸었다는 의미), 망을 보았다는 망덕재, 말을 사육했다는 망생이골 등이 남아있다.

이에서 볼 수 있듯 쑥밭재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두곳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구형황이 강력한 요새를 구축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깊고 깊은 지리산 골짜기에 성터가 존재하고 그에 얽힌 구형왕의 사연이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아무런 규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문을 낳고 있다.

지리산 사람들의 구형왕에 대한 애착과 역사적 사실이 상존한 왕등재와 국골, 왕산의 갖가지 유적들에 대한 신비감은 갈수록 깊어만 가고 있어 이에 따른 학계의 정확한 고증 작업을 기대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내용 출처 : "지리산"  - 한중기 지음

 

 

1030m고지의 토성 안쪽 모습

 

토성의 흔적

 

1030m봉에서 내려와 보이는 왕등재

 

지리산 동쪽 자락에는 유난히도 고개가 많다.

쑥밭재, 새재, 외고개, 왕등재, 밤머리재 등 모두 5개나 된다.

이중 쑥밭재와 새재는 등산객들이 다소 찾아 보편화해 있으며

밤머리재는 지리산 동쪽 자락을 두동강 내는 포장도로가 열려있다.

반면 왕등재와 외고개는 아직도 수수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머지않아 이들 고갯마루도 인파의 시달림을 맞을 것이다.

 

1030m봉 지나 수철리 갈림길 고개에서 보이는 외고개, 새재, 새봉

 

왕등재습지 아래쪽의 평원

 

그 곳의 가을이 보고 싶어

그 곳의 꼬마 고추잠자리가 보고 싶어

그 곳에서 구형왕의 흔적을 찾고 싶어

그 곳을 갔다.

 

해발 960m에 펼쳐진 왕등재습지

너비 50m 가량에 120m 길 게 펼쳐진 왕등재의 늪은

사철 물기가 서려 나무는 자라지 못하고 풀밭만 펼쳐져 있다.

습지 주위 광활한 산상의 평원은 억새와 싸리나무로 뒤덮여

가을 분위기를 한층 더하고 있었다.

평원 저멀리 천왕봉과 중봉이 우뚝 솟아 있어 색다른 운치를 자아낸다.

 

1996년 9월 1~1.5cm의 꼬마 고추잠자리가 발견되어 왕등대습지는 세간에 알려진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고층습원으로서의 학술적 가치가 높아

자연휴식년제 시행지역으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다.

습지에는 들어가지 않고 주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꼬마 고추잠자리는 오늘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왕등재습지 안내판과 다리

 

다리에서 보이는 왕등재습지

 

가을을 맞이한 고산습지 - 꼬마 고추잠지리는 보이지 않았다.

 

꼬마 고추잠자리(사진제공 - 세계일보)

 

평화로운 고산습지

 

습지의 북쪽 모습

 

습지에서 자라는 수양버들

 

습지에서 지척의 서왕등재라 불리는 왕등재를 올라 선조들을 생각한다.

왕등재는 가야국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양왕)의 한맺힌 구국 정신이 깃들인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구형왕은 나의 선조이며 가야국은 나의 시조 김수로왕이 세운 선조의 나라이다.

지리산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선조의 고통은 얼마였을까.

고통 감내하며 나라를 이양할때 그 마음은 어찌 하였을까.

오랜 세월이 흘러 오늘 미온한 후손은 어찌할바 몰라 머리만 조아린다.

 

왕등재 가는 길

 

왕등재(1040m)에서 보이는 하봉, 중봉, 청왕봉

 

가을로 색칠하는 철쭉

 

도토리봉과 웅석봉

 

 

오봉마을에서 내려가는 길옆에는 구절초와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고

좁은 들판은 황금빛으로 평화로움을 색칠하고 있었으며

계곡의 물빛과 나무잎새도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호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나의 가슴에 가을은

찾아오고 있었다.

 

 2005년 10월 7일 진주에서